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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사 입문 - 유교의 역사 (한/위진남북조/송/원/명/청나라 시대)

by Reminiscence19 2022. 6. 8.

유교의 역사 (한, 위진 남북조, 송, 원, 명, 청나라 시대) - 세계 종교사 입문

  • 유교란 무엇인가
  • 한대의 유교 - 경학의 성립과 전개
  • 위진 남북조․수․당의 유교
  • 송․원 시대의 유교
  • 명․청 시대의 유교

썸네일-유교의역사

 

I. 유교란 무엇인가

유교는 일찍이 한민족(漢民族)의 역사와 더불어 발생하여 최근에 이르기까지 중국 민족의 정치․제도․사상․윤리․신앙의 주류를 이루어왔다.

나아가 한국․일본 등 동아시아 각국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영향을 미친 종합적 체계이다.

유교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공자에게서 비롯된 사상체계이다.

그러나 유교는 공자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창시된 것이라기보다는 은주시대 이래의 문화적 전통이 공자라는 인물을 통해 집대성되어 하나의 체계로 정비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예' 문화가 배태되었으며, 이는 이후 유교의 일반적인 특징을 형성하게 된다.

그 후 유교는 전국시대 말기의 맹자와 순자를 거치면서 사상적 내용을 풍부히 하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확대시켜나갔으며, 한 대에 이르면 여타의 사상들을 누르고 국교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중국의 유교는 종교상의 맥락에서 볼 때 경전의 해석을 통해 고대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며 하늘을 직접적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는 태도와 인간 내면의 성찰과 수양 및 사회적 윤리규범의 실천을 통해 궁극적 상태를 지향하는 태도의 두 가지 경향이 교체 또는 공존하면서 하나의 독자적인 흐름을 형성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유교의 경전

  • 육경 - 역(易), 시(詩), 서(書), 예(禮), 악(樂), 춘추(春秋)
  • 사서 - 대학, 논어, 맹자, 중용

 

II. 한대의 유교 - 경학의 성립과 전개

1. 유교 국교화의 도정

□ 순자: 유가적 정치론과 현실의 권력질서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예’의 개념을 제시함.
맹자: 인간의 본성에 선의 요소가 내재해 있기 때문에 인․의․왕도로 전개해 나갈 수 있다.

전한의 무제기가 되어 유교는 국교의 지위에 놓인다. 법가 이념을 채택했던 진나라의 조기 멸망으로 법가와는 형식적으로 거리가 있었다.


2. 재이사상과 위서

재이란 천재지변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자연현상들은 단순한 자연현상으로서가 아니라 개인 또는 사회, 국가의 일들과 어떤 관련을 가진 것이라는 사고방식으로 해석되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인간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바로 천이다라고 하는 생각이 생겨났으며 그 천을 주제하는 절대자로서 천제를 상정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할 수 있다. - 천인합일, 천인상관


3. 금문, 고문 논쟁

전한 무제 때에 동중서의 ‘현량대책’에 의하여 유교는 다른 사상체계를 능가하는 중국에서의 국교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유교의 경전인 오경을 담당하는 오경박사가 국가기관의 하나로서 정립된다.

오경박사의 학풍은 소위 금문학이라고 불리는 학파에 의해 점유되어 있었는데, 금문은 당연히 고문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한대 통용의 문자였던 예서로 쓰인 경의 텍스트를 말한다.

이와 같이 금․고문의 각각의 학파가 표준으로 삼는 텍스트의 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들을 금문학파, 고문 학파로 불러 중국 경학사의 한 시기를 대표하고 있다.

분서갱유 이후에 경전을 암송하고 있던 사람이 기록한 책을 <금문경전>이라 하고, 공자 구택의 벽속에서 발견된 고문으로 쓰인 텍스트를 <고문 경전>이라 부른다.

4. 위서의 유행에 대한 유교적 합리주의의 저항

위서를 중심으로 한 신비적인 참위사상은 후한시대에 크게 유행한다.

재이, 상서의 사상은 그 중핵을 이루지만, 그 외에도 천문점을 주도하는 미래 예언 혹은 도교의 중심사상인 신선설 등 각종의 신비 사상이 금문 학파의 천인 상관설을 배경으로 하여 유행하였다.

이 시대를 풍미한 참위사상을 내학이라 부르며 존중하는 학풍이 일어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위서로서 체계 잡힌 사상을 논할 수 있는 것은 후한 중기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정현이 위서의 각서에 주를 붙인 사실을 보더라도, 후한말에는 위서가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명확히 언제 그러한 체계가 확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5. 정현과 한대 경학의 종합적 체계화

후한의 유교(경학)를 대표하는 학자는 정현이다. 그는 금문학과 고문학을 총합 집대성하여 후한의 경학을 집대성하였다는 점에서도 후한 경학의 제 일인자로 불러 손색이 없을 것이다.

정현이 유교사에 끼친 공적은, 경학 전체의 긴밀한 종합 체계화였다. 금문학과 고문학의 종합화는 정현에 의해 완성된다.

전한 말의 유향과 유흠에 의해 구축된 육예일체관의 기초 위에서 이것을 충실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충실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위서이다.



III. 위진 남북조․수․당의 유교

1. 육조의 시대적 성격과 유교의 실태

일반적으로 위진남북조는 ‘현학의 시대’라고 말해진다. 또는 불교의 시대로 성격 지어지기도 한다.

한대에서부터 육조에로의 변천은 확실히 유교적 정신의 쇠퇴라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유교 중심의 교육을 하는 관학이 일반적으로 귀족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2. 북조의 유교

북조의 경우, 오호십육국에서는 남조의 학교제도를 모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전진의 부견은 노장․도참의 학을 금지시키고 오로지 유학만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영유가 많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북위의 유교 전문가는 지방의 한문(寒門) 출신이 대부분이었는데, 이와 같은 지방 벽지를 중심으로 한 유교의 발전은 지역적 결절성에 의해 대도시 문인들 사이에 유행한 귀족풍의 현학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고, 경학에 있어서도 비교적 순수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3. 현학의 유행 및 육조 경학의 특징

한말에서 위진남북조에 걸쳐 경학이 쇠퇴한 이유는 가장 상식적으로 말해서 ‘현학의 유행’이라는 현상 때문이다. 보통 정시지풍으로 불리는 현학 유행의 초기 풍조는 유교와 도가의 타협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원강의 연호로 대표되는 서진 시대가 되면 유도와의 절충이라는 불철저한 입장을 버리고 오로지 현학에로 기울어지는 풍조가 나타난다. 원강에 이르러 노장은 유교를 압도하게 된다.

남북조에 있어서 경학의 전문가에 대한 경멸은 훈고의 학으로서 부활한, 귀족 사대부의 유교의 성격을 독특한 것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 현실적 관심과 욕구로부터 분리된 귀족의 교양으로서의 유교연구, 경전의 연구는 그들의 신분적․정신적 우월함을 보여주는 장식물에 불과하였다.

그렇게 때문에 그 경학은 훈구라고는 하여도 정치 주도함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도면밀함을 주로 하는 경학 전문가는 국가의 도구에 불과하였고 귀족의 경학은 박학과 참신함을 최우선으로 요구하였으니, 그것이야말로 교양으로서, 장식물로써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육조 경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4. 남북조의 경학

□ 북방: 학문의 경향이 보수적이어서 후한말의 정현학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고문학이 계승됨.
남방: 사변적이며 새로운 현학풍의 해석을 보여준다.

5. 수․당의 유교

남북조의 분립 시대는 수 문제의 천하통일에 의해 종언을 고한다. 

남북조 후기가 될수록, 남조와 북조의 학술상의 차이는 좁혀지게 되고 학술적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통일시대를 준비한다. 하지만 수는 단명했기 때문에 후의 당나라에게 모든 짐을 지우게 된다.

‘정관의 치’ 당 태종은 남북으로 나누어진 경학의 여러 갈래를 통일하여 체계적인 관점에서 국가정책의 지배 아래 두고자 하였다.

그래서 안사고에게 명하여 경서의 정본을 작성하게 하고, 공영달에게 명하여 경의의 통일을 이루게 한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경학의 집성이 바로 <오경정의>이다.

이러한 거대한 집성에 의해 남북으로 나누어 있던 경학은 형식적으로 통일되었으나, 실제로 그것은 남조의 학풍에 치우친 통일이었다. (642년)


IV. 송․원 시대의 유교

1. 송나라의 성립과 송대 사상의 특징

3백 년 간 계속된 당나라가 무너지고, 오대십국이라 불리는 정치적 혼란의 시대가 근 50년 간 계속되었다.

오대의 마지막 왕조인 후주의 절도사였던 조광윤은 후주의 공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천자가 되었다.

건륭원년(960년), 국호를 송으로 고친 조광윤은 번진을 폐지하고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여 중앙집권을 확립하는 정책을 써서 송나라 3백 년의 기업을 닦았다.

중국 역사상 송나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상의 면에 있어서는 더욱 그 의미가 부각되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주자학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거론되는 유교의 새로운 발전이 송대에서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중국의 역사를 구분할 때 오대십국을 전환점으로 하여 당 이전과 송 이후의 성격이 아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여 송 이후는 사대부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으며 과거에 의해 뛰어난 인재들을 선발하여 관료로 삼아서 군주 독재적인 중앙집권 정치를 보좌하게 하는 형태가 정착하였기 때문에 그렇다.


2. 사대부의 존재와 송악의 이념

송악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왕조의 실질적인 유지자인 관료 곧 지식인이 정치․사회․사상의 전면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들을 사대부라고 부른다.

사대부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중소 지주계급이며, 과거를 통해 다시 말해 세습 신분이 아니라 개인의 자질에 의해 자신의 지위를 개척해 나가는 지식계급이다.

그들은 유교적인 교양에 의해 관료가 되어, 유교적 이념 - 修身齊家治國平天下 - 를 실현시켜야 할 의무를 지닌다.


3. 신법당과 구법당: 북송 사상의 핵심

관료․사대부 내부의 파벌 항쟁은 서로 정의를 주장하며 격렬해지며, 북송 최대의 약점이 된다. 관료 사이의 대립은 신법당․구법당으로 양분되어 벌어지게 되고, 그것은 송대 학문의 방향을 좌우하게 된다.

□ 왕안석 신법
그의 의도는 나라의 재정을 풍부하게 하는 데 있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세금을 더욱 많이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안으로 지주 및 상인의 세력을 억제하고 농민에게 저리의 융자로 생산력을 높이는 것을 고려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구법당 인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힌다. 구법당 인사들은 왕안석의 이러한 경제정책을 반대하고, 그 경제정책의 대립은 곧바로 구법당․신법당의 정치 대립으로 이어진다.


4. 도학의 성립

철학적 이론면에서 취약했던 한당의 훈고학과는 달리, 도학은 불교의 이론을 섭취하여 사상적 내용을 심화시켜나간다.

그리고 전통적인 음양오행사상을 이용하고 또 노장사상과 도교의 자연사상들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유교야말로 가장 뛰어난 이론적 정합성을 지닌 교학임을 과시하고자 했다.

송학은 이와 같이 철저한 도의 의식을 근거로 하여 전통 유교에 새로운 요소를 부가하여 새로운 유교이념을 창출해 내었기 때문에 신유교라 불린다.


5. 남송 성립과 주자학의 형성

휘종 때에 금나라는 요나라를 멸하고 송나라에 침공해 온다. 이윽고 금나라는 송나라의 두 임금을 잡아갔다.

그 후 1127년 고종이 즉위하여 양자강 이남의 항주 임안에 도읍을 정하게 된다. 역사에서는 이때부터를 남송이라고 부른다.

송나라는 문화적으로는 대단한 발전을 이룬 시대였지만, 군사력에 있어서는 매우 연약한 나라였다.

효종 때에 시강까지 나간 주희는 북송의 여러 유교 사상가들을 총합․정리하여 체계화된 사상 구조를 완성했다.

중국에서는 전대까지의 문화적 유산을 총합하여 정리하는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ex. <오경정의>, <정현의 학문> 등)

방대한 주희의 업적은 송나라가 처한 국가적 모멸감에서 나오는 민족주의적 성향과 한민족의 부흥을 황제․사대부․관료․서민의 전민족적 윤리적 각성에서 촉구하는 면이 아주 강하다.

이런 강한 윤리적 성격 때문에 원․명․청 3대를 통해 그것은 국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6. 주자학의 윤리주의적 성격

주희는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기초하여 <태극도설해>를 썼다.

理를 강조한다. 이(理)가 천지만물의 이(理)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간의 도리라고 해석

기는 금목수화(金木水火)이며 이(理)는 인의예지이다라는 것처럼 인간에 부여된 이(理)는 윤리적 규범으로서의 인의예지(仁義禮智)였다.


7. 주자학의 대항자

주희는 <태극도설>을 이기론의 근거로 삼았지만, 여기에 정면으로 비판을 가한 인물이 육상산 형제이다.

육상산의 형 육구소는 ‘무극이태극’ 중의 ‘무극’ 개념은 유교의 경전에는 나타나지 않고 노자에 나오는 개념이라는 사실과 태극도는 도사진단에서 유래하는 허무, 고원의 이론으로서 유교의 평범하고 현실적인 상과는 배치된다는 점을 들어 주희에게 반론을 제출하였다.

이 두 사람의 최대의 차이는 ‘심즉리’와 ‘성즉리’에 있다고 하고, 또는 학문 방법의 면에서 ‘존덕성’과 ‘도문학’의 차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 둘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다른 기반 위에 서 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 현재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둘은 결국 ‘이(理)를 최고의 존재론 본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8. 원대의 유학: 주륙 조화의 입장

남송말 육상산과는 반대로 주희의 이학은 이미 천하에 퍼졌다. 원대 유교를 대표하는 오징도 당연히 주자학적인 출발을 한다.

하지만 주자학 유일의 방향을 선택하진 않았다. 그 이유는 관학화 된 주자학 말류의 폐해, 즉 주자학의 훈구화, 속학화에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육상산의 특질을 이해하여 주륙조화의 방향에로 나간다.

그러나 오징은 동시에 당시의 육학에도 불만이었는데 이 주륙에 모두 만족하지 못했던 오징은 주자학의 기본적 가르침은 ‘독서강학’이며 육상산의 기본은 ‘진지실천’인데 학문은 반드시 ‘진지실천’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며, 그 방향에서 주자․육성산을 조화시키고자 한다.


V. 명․청 시대의 유교

1. 명대 초기의 주자학

다시 한민족에 의한 왕조를 수립한 주원장은 정권 획득 과정에서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정치제도와 문교 정책 등에 유교이념을 적용하였다.

학자들을 초빙하여 정치제도와 문교 정책 등에 유교이념을 적용하였다. 한민족 멸시 정책을 사용한 원대에 그리 진작되지 못했던 유교는 이제 다시 국가적 보호 하에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반면 정치적 제약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락제의 재임기간에는 주자와 그 문하들 그리고 송학자의 주석을 집대성한 <사서대전> <오경대전>을 편찬하였고, 성리학설을 집성한 <성리대전>을 편찬 반포하여, 국가적 이데올로기의 소재를 명시하였다.

하지만 명초엔 학자들에게서 볼 만한 학문적 업적을 찾을 수 없다. 명대 후반에 와서 학술 논의, 강학 활동 및 저술의 출판이 활발해지는 것과 비교하면 명초는 학술의 침체기라고 볼 수 있다.

명초에서 명 중기로 이행하는 시기에는, 이미 명초에 확립된 과거의 상투성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고, 삼대전에 대한 재검토가 진행되고 새로운 주석이 시도되면서 심학의 고양이 현저해진다. 반면 심학에 대한 대항 의식과 사상 대립도 드러나게 되어 학술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양명학의 성립을 맞이하게 된다.


2. 양명학의 성립

엄격한 인간의 자기에 대한 각성과 실천을 요구하였던 주자학의 이념적 정신은, 원․명 왕조에 의해 주자학이 국교화되게 되면서 껍데기만의 엄격주의로 타락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양명이 출현한다. 단적으로 말해 왕양명의 사상적 과제는, 이상주의를 상실한 주자학을 비판하고 원래의 유교의 입장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이미 왕조 권력과 결합되어 지배체제 유지의 이데올로기로 봉사하는 주자학의 극복이 첫 번째 단계였다. 왕양명은 그 과제를,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정의 바로를 바탕으로 삼는 이론체계를 세움으로써 수행한다.

주자는 ‘격물치지’에 지식 탐구 측면을 강조한 반면 양명은 정신수양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3. 기의 사상과 명대 유교

명초의 주자학은 기(氣)를 이(理)에 충족시키는 이선 후기론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명대 중기로 들어가면서, 일반적인 기풍은 현실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고, 주자학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 반성이 나타난다. 

나흠순은 종래의 주자학을 이기론(理氣論)의 측면에서 수정하고자 하는데, 그는 이(理)와 기(氣)가 대립하는 두 개의 존재가 아니라 기의 운동 및 감응의 조리성이 이(理)라고 보았다.

이런 이(理)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기(氣)의 독자적 존재를 강조하는 ‘기(氣)의 사상’은 그 후 왕정산, 오정한, 당학징, 명말 청초의 진확, 왕선산, 정정조를 거쳐 청대 중기에 대진에 의해 완성된다.


4. 명말청초의 사상적 과제: 실학의 대두

명말 청초는 연호로 말하면, 명의 만력 말에서부터 청의 강희 중엽까지의 약 백 년 간을 지칭한다.

이 시기는 농민반란, 명 붕괴, 청나라의 중화 지배, 이에 대항하는 남명 정권의 흥망 등 정치적 격동의 시대였다.

그러나 문화적․사상적으로는 중국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독자의 영역을 개척하였다.

이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긴 데서 시작하는 역사에 대한 반성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경세치용(經世致用) - 학문은 실제로 세상에 쓸모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 의 정신을 심어 주었다.

이 시대의 지식인들이 추구한 것은 ‘공(空)에 대한 실(實)의 발견으로 사회와 정치의 변혁에 구체적․실질적으로 유용한 학문이었다. 그러한 학문의 정신을 그들은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의 학문은 '경세치용의 철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경서․사서의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연구야말로 경세치용의 방법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스스로의 이상을 가지고, 그것을 저해하는 현실의 개혁을 위해 과거의 풍부한 경험을 습득하기를 원하였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할 광범하고 풍부한 독서와 학식이 요청되었다.

‘박학다독’이 그들의 주장이었으며, 사실과 유리되지 않은 객관적인 학문 태도가 그들의 특징이었다, 이 점은 처대 건륭기․가경기에 완성되는 고증학에 계승․발전되었다.


5. 고증학의 정신

청대 중기 건륭․가경에 들어가게 되면 고염무 등에 의해 단초가 열린 고증학이 최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고증학의 전개는 학자들의 출신지와 학통에 따라, 크게 오파와 완파로 나누어진다.

사상적으로 비교적 침체한 듯 보이는 청대 고증학의 기풍 속에서도 이채를 띠는 사상가가 있었는데 바로 ‘대진’이다.

대진은 청대 고증학이라고 불리는 청대 경학의 완성자로 칭하여진다.

그것은 그의 학문적 업적에 대한 평가로서만이 아니라, 그의 학문을 뒷받침하는 사상적 깊이가 동시대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이 시대의 사상이 높은 수준에 도달하는 데 큰 힘을 발휘했기 때문에 내려지는 평가로서 의미가 있다.


6. 청말의 사상과 정치

19세기 상반기는 중국 봉건사회가 쇠퇴의 국면으로 접어드는 시대였다.

이 시기에 접어들며 관료의 부패, 농민반란 등으로 인해 위기를 맞게 된다. 또한 아편으로 인한 폐해도 맞물려 경제적으로도 고갈을 가져왔다.

이러한 과제를 안고 시대적 문제를 고민한 인물로는 공자진과 위원이 있었다.

태평천국운동
1851년 1월 중국 남부에 태평천국이라고 불리는 혁명정권이 출현하였다.

태평천국은 1853년 3월에 남경을 수도로 하여 북경의 청나라 정부와 대치하였다. 결국 1864년 7월, 13년 간에 걸친 혁명정권은 한인 증국번이 조직한 사설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태평천국은 기독교적 천년왕국 사상을 핵심으로 한, 피압박 계급의 반체제 운동이었다.

그것은 청나라의 지배체제를 근본에서부터 뒤흔들고, 이어 등장하는 개혁운동의 자극제가 되었다.


출처: 청년사의 '세계 종교사 입문'의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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