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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사 입문 - 유대교의 역사 (토라, 의례, 탈무드, 랍비)

by Reminiscence19 2022. 6. 11.

유대교의 역사 (토라, 의례, 탈무드, 랍비) - 세계 종교사 입문

  • 유대교란 무엇인가
  • 유대교의 의례
  • 초기 유대교: 히브리 성서 시대
  •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
  • 랍비적 유대교: 탈무드 시대
  • 중세 유대교
  • 현대 유대교

썸네일-유대교의-역사

 

I. 유대교란 무엇인가

유대 랍비들은 유대교를 정의하려 한 적이 없다. 따라서 당연히 히브리어에는 유대교(Judaism)에 해당하는 용어가 없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유대인(Jew)의 종교’를 지칭하는 현대적 개념이다.

그러나 현대 세속 사회에서는 모든 유대인이 다 유대인 신자인 것은 아니므로 다른 방식의 정의가 요청된다.

이때 신앙과 의례의 복합체계로서 유대교를 규정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것은 한마디로 ‘토라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토라의 여러 가지 의미

① 하나님의 계시
② 율법

  • 협의: 모세오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 광의: 히브리 성서 전체, 미쉬나, 예루살렘 및 바빌로니아 탈무드, 미쉬라쉬 문헌, 히브리 성서와 탈무드에 대한 주석, 그밖에 신비주의 문헌과 윤리 철학적 문헌을 포함한 모든 유대 종교 문헌 전승을 뜻함

③ 지혜
④ 중세 카발리즘에선 하나님과 동일시함 - 합일

다시 말해 토라는 유대적 삶의 최고 이상이라 할 수 있다.


2. 유대교의 기본적인 특성

① 유대교는 오직 야훼만을 창조와 도덕 그리고 정의의 유일한 원천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윤리적 유일신관의 종교라 할 수 있다.
② 유대교는 특유의 선민사상과 계약 사상을 배경으로 집단적 역사의식을 강조한다.
③ 유대교는 대체적으로 형이상학적이라기보다는 현세 지향적이며 행위를 강조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 지상에서의 ‘거룩한 삶’의 구현을 가장 중요한 종교적 목표로 간주.



II. 유대교의 의례

1. 거룩한 하루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날마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에 걸쳐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 시간과 장소는 각자 형편에 맞게 결정되며 그때마다 쉐마 또는 아미다 기도문 그리고 토라나 예언서를 낭독한다. 

경건한 유대인의 하루는 태초의 창조 사건과 출애굽에서 나타난 구속 사건 그리고 시나이산에서 토라를 받은 사건 등이 일상을 뚫고 침투해 들어와 거룩한 시간으로 재현된다고 말할 수 있다.


2. 거룩한 주간 : 안식일

히브리어로 샤바트(Shabbat)라고 불리는 안식일은 ‘안식일 중의 안식일’로 여겨지는 욤 키푸르를 제외하고는 유대교의 모든 축일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축일로 인식되고 있다.

안식일의 의미

① 안식일을 통해 창조를 기억
② 출애굽 사건을 상기함으로써 인간 역사에 개입하는 구속자 하나님을 기억

유대인의 가정을 결속시켜주고 나아가 유대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 유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온 안식일은 창조적인 유대 정신을 가능케 한 토대이자 원동력이라고 평가될 만하다.


3. 거룩한 한 해 : 계절 축제

(1) 로쉬 하 샤나 (Rosh Ha-Shanah, 신년맞이 대축제)
티쉬리달 1일~10일까지의 기간 중에 기념되는 가을 축제 - 열흘간의 회개 기간 or 심판의 날

이 축제는 무엇보다도 유대력의 새날 신년 새 아침이 회개의 기간으로 지켜진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동시에 그날이 종말론적인 심판의 날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유대교가 지닌 지극히 강렬한 종교적 동기를 함축하고 있다.


(2) 욤 키푸르 (Yom Kippur, 속죄일)
유대인들은 로쉬 하야나 기간 중 마지막 날을 특별히 속죄일로 정하고 이날은 24시간 내내 금식을 한다. 안식일 중의 안식일로 여겨질 만큼 모든 세속적인 일상이 철저히 금지되며 가장 장중하고 의미 깊은 금식일로 지켜진다.

(3) 수코트 (Sukkot, 초막절)
욤 키푸르 이후 닷새째 되는 날, 즉 티쉬리 달 15일부터 8일 동안의 기간으로 이전의 경건한 분위기가 이날을 기점으로 기쁨의 축제적 분위기로 바뀐다.

(4) 심하트 토라 (Simhat Torah, 기쁨의 토라절)
초막절 절기가 끝난 다음날. 이 날을 기준으로 회당 예배 때 회중이 함께 낭송하는 토라 읽기가 한 차례 끝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5) 하누카 (Hanukkah, 봉헌절)
유대력 키스레브 달 (11-12월경) 25일부터 8일간 지켜지는 절기로서 일명 ‘빛의 축제’라고도 불린다. 미국의 유대인들은 이날 마치 크리스마스처럼 서로 선물교환도 하고 각 가정마다 축하행사를 갖기도 한다.

(6) 부림절 (Purim)
유대력 아다르 달(Adar, 2-3월경) 14일로서 히브리 성서 에스델서에 기록된 유대 설화로부터 유래된 축일이다.

(7) 페사크 (Pesach, 무교절)
유대력 니산(Nisan, 3-4월경) 15일부터 8일간 행해지는 봄 축제로서 과월절 혹은 유월절이라고 불린다. 이 무교절은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된 사건, 즉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출애굽 사건은 유대교의 공동기도문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할 정도로 유대인에게는 매우 의미 깊은 구속 사건으로 상징된다. 그리고

(8) 샤부오트 (Shavuot, 칠칠절)

(9) 아브달의 9일째가 있다.




4. 거룩한 일생 : 통과의례

(1) 출생
유대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남아인 경우 출생 후 8일째 되는 날에 할례 의식을 행하고 히브리어 이름을 지어준다. 할례는 히브리어로 ‘브리트 밀라’라고 하는데 이때 브리트란 ‘계약’을 뜻하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할례란 ‘할례의 계약’을 줄인 개념이다. 이로써 유대인이라면 마땅히 권리와 의무로 주어지는 사명, 즉 하느님과의 계약을 맺은 백성으로서의 성실성을 증거 할 자격이 주어진다.

(2) 성년식
할례를 받은 유대 남아는 13세가 되면 계명 준수를 맹세하는 의식을 치른다. 이 의식을 거쳐야 비로소 그는 계명 준수의 의무가 주어지고 유대 공동체의 한 성원으로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다.

(3) 결혼
유대 결혼식에서는 결혼 기도문에는 신부로서의 시온과 신랑으로서의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결합될  것을 꿈꾸는 유대 공동체의 오랜 소망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이와 같이 가장 기쁜 날에도 성전을 파괴당하고 유랑하는 민족으로서의 슬픔을 잊지 않으면서 한 쌍의 기쁨이 완전해 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 슬픔이 변하여 기쁨으로 완성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

(4) 죽음
유일신 야훼에 대한 아브라함의 신앙은 어느 이름 모를 유대인의 삶에서도 처음과 끝을 관통한다. 시신을 땅에 뭍은 후 마지막으로 가족들은 카디쉬, 즉 하느님의 이름을 축성하는 종말론적 기도를 암송하면서 메시아의 임박한 도래를 기원한다. 결국 죽음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의 삶은 특정 개인만의 삶일 수 없으며 거기에는 언제나 유대 공동체의 집단적인 기억과 꿈이 드리워져 있음을 보게 된다.



III. 초기 유대교: 히브리 성서 시대

1. 족장시대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신앙고백에서 “제 선조는 떠돌아 사는 아람인 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아브라함을 그들의 원조로, 그들이 믿는 유일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으로 확인한다.

아브라함과 부족과 맺어진 계약은 무엇보다도 유대교의 근간에 흐르는 선민의식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유대인에게는 이 선택의 가시적인 표징으로 할례가 요구되었다.


계약 관념의 의의
① 유대교의 계약 관념은 신과의 계약 당사자인 인간이 존귀하다고 하는 사유를 밑에 깔고 있다.

② 계약에는 절대적인 순종과 충성에 대한 요구가 내포되어 있다.
③ 계약은 신이 인간의 역사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여 궁극적으로 신의 뜻을 실현시킨다고 하는 특이한 역사의식과 연관 지어진다.

2. 모세시대: 출애굽과 시나이산 계약

야곱의 아들 요셉 설화에 의하면 야곱 부족은 이집트의 고셴 지방으로 이동하여 거기서 오랜동안 번성한 듯싶다.

그러나 요셉을 모르는 새 파라오의 통치하에서 히브리인은 이집트인의 노예가 되었고 날로 불어나는 히브리인들에게 위협을 느낀 파라오는 새로 태어나는 히브리 남아는 모두 죽이라는 포고령을 내렸다고 한다.

레위지파의 여자에게서 모세가 태어난 것이 바로 이때였다. 죽음을 피하여 나일강 갈대숲에 버려진 모세는 파라오의 딸에게 발견되어 그녀의 보호 아래 왕궁에서 성장한다.

성인이 된 모세는 자신이 히브리 인임을 알게 되었으며 같은 동족이 당하는 수모를 보고는 이집트인을 죽이고 동쪽으로 홍해를 건너 미디안 땅으로 도주한다. 이를 출애굽 사건이라고 부른다.


출애굽을 한 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의 광야 시대에 유대교 사상 가장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하나의 사건을 체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전체가 야훼와 계약을 맺고 토라, 즉 계명을 받은 사건을 말한다.


십(10) 계명

  1.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2.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3.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5.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6. 살인하지 못한다.
  7. 간음하지 못한다.
  8. 도둑질하지 못한다.
  9.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증언을 못한다.
  10. 네 이웃의 소유나 아내를 탐내지 못한다.



3. 사사시대: 가나안 정복기 (1200~1020년 B.C.E.)

40여 년 간 시나이 반도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모세가 모압 땅에서 죽은 후 여호수아가 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가나안 부족과의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하여 여리고 성을 탈취함으로써 가나안 진입에 성공한다. 이후에 전개된 가나안 정복 기간 중에 이스라엘 12지파는 실로에 계약 궤를 안치하고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연방제 형태의 부족 공동체를 구성했다.

이때의 지도자를 성서에서는 사사(shoftim)라고 부른다.


4. 왕국 시대 (1020~586년 B.C.E.)

(1) 사울, 다윗, 솔로몬
사울
사울은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소년 다윗이 블레셋의 맹장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사건 이후 사울 왕은 점차 다윗을 정적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블레셋과의 길보아산 전투에서 아들들이 전사하자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다윗
사울 왕의 견제에 블레셋으로 도망치기도 했던 다윗은 이스라엘의 제2대 왕으로 추대된다. 그는 여러 면에서 국가의 기틀을 다져 놓는다.


솔로몬
다윗이 마련해 놓은 초석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최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하였고, 문화적으로도 최대의 황금기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눈부신 치적은 복잡한 사생활 및 폭정과 교차되면서 대단히 복합적인 평가를 내리게 된다. 이는 그가 죽은 뒤 왕국 분열의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2) 왕국의 분열과 신명기 개혁
931년 B.C.E. 솔로몬 사후에 왕국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하는 북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남유다로 양분된다.

북이스라엘
북쪽의 10지파는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하여 왕국을 세웠다. 또한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단과 벧엘에 국가 성소를 세웠다. 이 성소에 야훼의 상징으로 모신 금송아지는 이후 남유다와 여러 예언자들에게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이러한 혼합종교의 성향은 오므리, 아합 왕 때 더 강화되어 결국 바알신을 국가 신으로 대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시대에는 사회적 부패와 종교 및 도덕의 타락이 만연하더니 끝내는 722년 B.C.E. 앗시리아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남유다
남유다도 역시 주변 강대국의 시달림을 받았지만, 다윗 가문에 의한 정통적인 왕위 계승과 야훼가 예루살렘 성전 안에 거하면서 유다를 지켜준다고 하는 왕조 신학, 그리고 산세가 험한 지리적 환경 등으로 인해 비교적 사회적인 안정을 유지하면서 야훼 종교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다.


신명기 개혁
하지만 므낫세 왕 때 앗시리아 종교를 비호하게 됨으로써 남유다에서도 야훼 신앙이 부패하기 시작하였다. 요시야 왕에 이르러서는 히스기야 왕의 통일 정책을 이어받아 앗시리아 절정기의 앗수르바니팔 왕의 죽음을 기화로 621년 B.C.E. 크게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3) 예언자 전통의 형성
왕국시대에 일어나 포로기에 이어지기까지 활동했던 예언자들의 사상은 히브리 성서와 유대교 정신을 이해하는 데에 거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모세의 유일신관 및 계약 사상이 확고한 윤리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 바로 예언자 전통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예언자의 역할

① 야훼의 대변자로서 신탁을 선포하는 일.
② 신권과, 왕권의 중재
③ 고대 계약 전승의 전달 등

  • 전기 예언자: 나단, 엘리야, 엘리사
  • 후기 예언자: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이제키엘, 제2 이사야

 

5. 포로시대와 에즈라의 종교개혁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바빌론 유수는 엄청난 충격으로 경험되었다. 그러나 포로기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의를 드리진 못했지만 대신 안식일과 할례에 대한 관념을 더욱 확고히 하고, 오늘날 회당의 원형이라 할 만한 예배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모세오경을 문헌화하는 등의 새로운 자기 확인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포로기 유대인들이 고대했던 이상 사회의 조짐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느헤미야와 에즈라의 지도 아래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고 아울러 사회의 정신적 개혁이 도모되었을 때에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즈라의 개혁을 통해서 가능케 된 것

① 제도적 사제 계급의 형성
② 의례체계의 틀 확립
③ 히브리 성서의 틀 확립
④ 토라의 준수를 통한 민족적 동질성의 확인



IV.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

331년 B.C.E. 알렉산더 대왕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이래 유대인의 정치적 운명은 그리스와 시리아, 로마에 의해 차례로 좌우되었다.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은 특히 그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 그리스적 사조를 통상 헬레니즘이라고 부른다.


이 시기엔 팔레스타인 유대인이 당면했던 문제들에 대해 각기 상이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나섰던 소종파들이 등장한 시기였다.


① 사두개파(Sadducees)는 성전 의례 중심적이어서 70년 C.E. 제2차 성전 파괴 이후에는 존립기반이 없어짐에 따라 자연히 쇠퇴해버린 종파였다.

② 에세네파(Essenes)는 헬레니즘 문화나 정치적 소용돌이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금욕적이고 초세속적인 집단 은둔생활을 강조하였다.
③ 유대-기독교도들(Jewish Christian)은 로마 통치기에 예수를 추종했던 무리이다.
④ 헤롯파(Herodians)는 헤롯의 가문을 지지하며 로마에 대해 호의적이면서도 유대 자치 정부를 세우고자 하였다.
⑤ 젤롯파(Zezlots)는 로마에 대해 적극적인 무장반란을 도모하였다.

이 중 유대-기독교도들만이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방-기독교도(gentle-Christianity)들과 연결되어 기독교의 교세를 확장하게 되었다.


또한 바리새파(Pharisees)라고 불리던 집단은 성전 파괴 이후의 유대교를 이끌어갈 주역으로 남게 된다.




V. 랍비적 유대교: 탈무드 시대

1. 제2차 성전 파괴와 정경의 확정

(1) 반로마 저항운동과 제2차 성전 파괴
자주적인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유대 민중의 잠재적인 열망은 특히 그들의 종교적인 욕구가 좌절될 때마다 가시화되곤 하였다.

제2차 성전 파괴
66년 C.E. 네로 통치 말기에 이르러 반로마 독립운동은 대규모 전쟁으로 확산되었는데, 네로는 베스파시안 장군을 파견하여 68년 C.E. 무자비하게 이를 진압하였고 곧 로마의 황제가 된 베스파시안이 디도 장군을 보내 철저하게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킨 것을 말한다.


디아스포라
로마의 유대인에 대한 가혹적인 탄압이 계속되자 유대인들은 탄압을 피해 바빌로니아뿐만 아니라 북부 아프리카, 유럽 등지로 대규모 이동을 시작했는데 세계 각지로 흩어지어 형성된 이 유대교 공동체를 일반적으로 디아스포라라고 부른다.


(2) 야브네 학파와 정경 확정
유대인들은 제1차 성전 파괴 당시 에즈라의 개혁으로 모세오경이 확정되었듯이 제2차 성전 파괴 이후에도 야브네 학파를 중심으로 서둘러 경전 편찬에 눈을 돌림으로써 민족의 위기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독특한 반응을 보였다.


2. 회당

제2차 성전 파괴 이후의 유대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회당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회당이란 히브리어로 ‘베트 하크네세트(Beth Hakneseth)'라고 하며 영어권에서는 시나고그(Synagogue)로 불리는 유대인들의 공동집회 장소를 지칭한다.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모여 기도와 예배를 드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회당이 교회나 성당 또는 모스크나 절과 같은 성전은 아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삶에서 성전은 오직 시온산 위에 건립되었던 예루살렘 성전 하나뿐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회당은 지극히 소박하고 인간적인 필요성에 따라 생겨났다.



3. 랍비

오늘날 회당과 랍비는 제도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랍비는 통상 특정한 회당 공동체의 지도자로 여겨진다.


4. 탈무드: 구전 전승의 집대성

히브리 성서를 확정 지은 바리새 랍비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유대 구전 전승들을 모아 편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는 물론 성문화 된 토라와 구전 토라, 즉 전통을 모두 중시했던 바리새파적인 입장에서 비롯된 작업이었다.


역시 야브네 학파에 의해 이루어진 이 작업은 <미쉬나>의 편찬으로 첫 번째 결실을 보게 된다.


후에 이 <이쉬나>에 주석을 붙여 <게마라>라고 불렀고, 그 이후 지적인 권위를 받은 바빌로니아 학파는 <탈무드>를 편찬하였다.

오늘날 정통 유대교의 신앙과 실천의 모든 측면에서 백과사전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탈무드라는 용어는 여구 또는 학문이란 뜻을 지닌 히브리어인데 이는 통상 게마라와 미쉬나를 합쳐 부르는 탈무드 토라의 약자로 쓰이는 말이다.




VI. 중세 유대교

1. 이슬람 지배하의 중세 유대교 (세파르딤 유대인)

이슬람의 경우 기본적으로 유대교를 계시 종교로서 그리고 유대교도들을 ‘책의 사람들’로 인정하면서 대체로 국가에 의해 유대인에 대한 차별적이지만 법적인 보호를 승인하고 있었다.

이슬람 지배하에서 일부 유대인들은 특히 상업에 수완을 보여 이슬람 정복자들의 뒤를 쫓아다니며 ‘유배지의 황금시대’를 경험하였지만 이슬람 몰락 후엔 미운 오리 새끼 신세를 면키 어려웠다.


2. 기독교 지배 하의 중세 유대교 (아쉬케나짐 유대인)

아쉬케나짐 유대인들은 한마디로 암흑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 바로 유대인이라는 교회의 뿌리 깊은 편견은 일반 대중들에게 반유대주의라는 집단적 무의식과 그로부터 표출된 경멸감이나 증오심을 정당화시켜주었다.


수 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유대 공동체를 매번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고 그 후 발생한 흑사병은 유대인을 최악의 곤경에 빠뜨렸다.

일부 기독교도들이 그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뒤집어 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곧 대규모 학살로 이어졌다. 그리고 국가에서의 추방으로 이어졌다.




VII. 현대 유대교 (연표 참조)

1516: 이탈리아 게토 시작
1521: 팔레스타인 이주 시작 
1648: 폴란드/우크라이나 유대인 대학살
1791: 프랑스 유대인 시민권 획득
1870: 이탈리아 게토 제도 폐지
1882: 팔레스타인 이주 본격화
1917: 발포어 선언
1934: 독일 유대인 시민권 박탈
1940: 홀로 코스트
1943: 바르샤바 게토의 반나치 항거
1948: 이스라엘 정부 수립
1967: 6일 전쟁


출처: 청년사의 '세계 종교사 입문'의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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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사 입문 - 인도 힌두교의 역사 (Hindu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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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힌두교의 역사 (Hinduism) - 세계 종교사 입문 힌두교란 무엇인가 인더스 문명의 종교 - 아리아인들 이전의 인도 토착종교 정통 브라만교 - 슈루티 전통 새로운 종교운동들의 등장 - 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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