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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사 입문 - 이슬람교의 역사 (교리, 신앙, 시아파, 순니파)

by Reminiscence19 2022. 6. 13.

이슬람교의 역사 (기본교리, 신앙, 시아파, 순니파, 쿠란) - 세계 종교사 입문

  • 이슬람의 개관
  • 이슬람의 역사
  • 이슬람 신앙

썸네일-이슬람교의-역사

 

I. 이슬람의 개관

이슬람은 570년경 아라비아 메카의 명문가(하심가)에서 태어나 632년에 사망한 예언자 무함마드가 알라의 계시를 받아 형성한 종교이다.

이슬람이란 아랍어 쌀람(Salam, 평화)에서 파생한 이슬라마의 명사형이다. 즉 모든 피조물인 무슬림들이 알라에게 완전히 복종할 때만이 완전한 평화가 깃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슬람의 대상인 알라는 우리말로 하느님을 뜻한다.


종교로서의 이슬람은 알라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쿠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를 근간으로 하는 실천체계이다.

무슬림들은 평화, 평등, 단결, 선린을 기본적인 모토로 하여 서로 형제애를 돈독히 하고 알라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특별한 성직체계도 없고 국적, 언어, 피부색, 빈부귀천에 상관하지 않고 오직 신앙적 믿음과 실천만을 강조한다.

실재적인 이슬람은 종교, 정치, 문화의 세 가지가 한꺼번에 뭉뚱그려진 생활양식이다.



II. 이슬람의 역사

1. 무명시대

이슬람 발생 이전의 사회를 우리는 자힐리아(무명시대)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이슬람 발생 이전의 시대가 미개 시대였다는 의미와 동시에 신앙적으로 암흑기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슬람 발생 이전 북부 아라비아 반도의 사회제도는 베드윈 부족주의였는데 척박한 환경에서 살다 보니 ‘부족 간의 복수’의 의무 등을 사회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방지한 기본적 요인으로 하였다.


또한 이 아라비아 반도는 예로부터 지중해지역과 동방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해 왔는데,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와 유프라테스강을 잇는 내륙 통상로가 페르시아의 사산 제국과 비잔틴 제국 간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마비되고 말았다.

따라서 무역상들은 험난하지만 안전한 서부 아라비아 지역을 택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상업 중심지로 부상한 곳이 바로 메카였다.


그러자 주변의 유목민들이 대거 몰려와 메카의 귀족상인들의 하층민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메카는 유목 내지 반유목 경제로부터 사업 경제로 이행하게 되었고, 이 이행과정에서 많은 사회적 모순을 낳았다.

또한 그 시대 메카의 지배계급인 쿠라이쉬족은 그들의 세력을 남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민중을 압박했으며 방탕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았다.


2. 이슬람의 발생

이 시기에 무함마드가 570년경 메카의 쿠라이쉬 부족 하심 가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고아로 자란 그는 모든 고통에 민감했으며,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항상 약한 자, 가난한 자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사려 깊고 온화한 성품의 고결한 인물로서 메카 사람들로부터 알 아민(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신망을 받게 되었다.


그는 25세 때에 15연상의 부유한 과부인 하디자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였다.

결혼에 의해 생활에 여유를 얻은 그는 메카 교외의 히라(Hira) 산의 동굴에서 명상에 잠기곤 하였는데, 그가 40세가 되던 어느 날 첫 계시를 받게 된다.

후에 두 번째 계시를 받은 그는 613년에 공식적인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예언자가 된 그는 알라가 많은 신중의 하나가 아니라 우주에 군림하는 유일하고도 영원한 신이라는 것과 그 신 앞에서는 모든 신자가 평등하며,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과 그 재산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그는 인간의 운명은 신의 손에 달려 있고 모든 인간에게는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교리는 당시 지배층이던 쿠라이쉬족의 눈에 거슬리게 되었고 결국 그의 추종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탄압에 아비시니아, 타이프로 이동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다시 메카로 돌아온 예언자는 메카에 모이는 순례자를 대상으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설교에 감동한 야슬립 순례자들이 그들 부족 사이 분쟁의 중재자로 와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그리하여 예언자는 야슬립으로 이민(622년 9월경)하게 되었고 이 이민을 우리는 히즈라(Hijra)라고 하여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야슬립으로 옮긴 무하마드는 후에 이슬람 국가 사회의 기초가 되는 움마(Ummah)를 창설하고 야슬립을 ‘메디나 알나비’로 개칭하였다.

이때를 고비로 무함마드는 종교집단만의 지도자가 아니라 정치상의 권위도 가진 지도자로 등장하며, 메디나에서 받은 계시도 이전의 순수한 종교적 성격의 지닌 것에서 입법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그 내용이 달라져 갔다.


이때 직면한 문제가 메디나에 부유하게 거주하던 유대인의 문제였는데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지지를 받기가 어려움을 깨닫고 우선 아랍인을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사회 건설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특유의 종교제도를 만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숫양의 뿔피리 대신 사람의 낭랑한 목소리로 기도시간을 알린다.

② 라마단월에 한 달간 단식한다.
③ 예배 방향은 예루살렘 대신에 메카의 카바로 한다.
④ 카바의 벽에 박혀 있는 거룩한 운석, 즉 ‘검은 돌’에 순례객이 입맞춤을 하는 것을 신성시한다.

또한 이때에 예언자는 메디나를 통과하는 메카의 대상들을 습격하였는데 그 결과로 유발된 커다란 전쟁에서 극적으로 승리하여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반도에 급속히 퍼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히즈라 10년, 예언자의 혁신운동이 진정으로 승리한 것을 상징하는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3개월도 못 되어 돌연 병사하였다.


무함마드는 다른 종교 창시자와는 달리 신앙의 창시자임과 동시에 정치기구인 국가를 건설한 사람이었다. 즉, 국가 생활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그는 종교와 국가가 분리될 수 없는 결합체 즉 움마를 건설한 것이다.

종교적 신앙을 기본으로 건설된 이 국가는 한꺼번에 아랍을 통일하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팽창을 도모하면서 이슬람 신앙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3. 정통 할리파 시대와 아랍제국의 건설

예언자의 후계자에 대한 언급 없는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추종자들 사이에는 격렬한 논쟁 때문에 움마공동체는 분열의 위기에 놓였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아랍 부족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는 족장 선임 방법에 따라 지도자를 뽑게 되었다.

무함마드의 권위는 예언자의 가장 친한 동료이자 예언자와 인척관계에 있던 4명의 인물에게 전해졌는데, 이 시기를 우리는 정통 할리파 시대라 하고 신앙상으로는 이슬람 황금기라고 한다.

할리파란 신의 사성인 무함마드 후계자라는 뜻이나 당시에는 예언자의 후계자 내지는 예언자의 대리자라는 단순 의미로 사용되었다.


초대 할리파 - 아부 바르크 (Abu Bakr)

아부 바르크는 예언자의 아내 아이샤(Aishah)의 친정아버지이다.

그의 취임 후 많은 이슬람 부족이 이탈하는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으나 그들을 다시 복귀시키기 위해서 아무 바르크는 각지에 신속히 군사를 파견함으로써 2년도 되기 전에 배교자들을 진압하였다.

이 시대에도 예언자의 유언에 따라 이라크와 시리에에 대한 대진격을 개시하였다. 그것이 바로 아랍인의 대정복의 시발이었다.


열광적인 이슬람 군대는 북으로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로, 동으로는 이라크를 거쳐 중앙아시아의 관문에 해당하는 페르시아로, 서로는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로 전진하였다.

이슬람군이 635년에 다마스쿠스를 점령한데 자극을 받은 비잔틴 군은 636년에 이슬람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는데 이슬람군은 비잔틴 군을 섬멸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전역을 무슬림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아부 바르크는 이 승전 소식을 듣지 못하고 열병으로 죽었다.

2대 할리파 - 우마르
10년간 할리파 직에 있은 우마르는 역대 할리파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최대의 정복활동을 벌여 이슬람 제국의 실질적인 창건자가 되었다.

641년 이집트 정복, 642년에 페르시아 고원 공략 등등....


제국이 팽창하면서 많은 제도들이 창안되고 정비되었으나 예기치 않은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그러던 중에 모스크에서 예배를 시작하려던 할리파 우마르가 페르시아 출신 기독교도 노예의 칼에 비명의 죽음을 당했다.


3대 할리파 - 우스만

우마르가 지명한 선임위원들은 알리 지지자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예언자의 다른 사위인 우스만을 지명하였다.

12년 동안 할리파 직에 있던 그가 이룩한 최대의 업적은 [쿠란]의 정본을 편찬한 일이었다.


또한 그는 중앙집권화를 강화하였는데 이에 반발하는 내부저항이 증가하였다.

결국 이집트에서 폭발... 결국 이집트에 대한 그의 처신에 격분한 불평분자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쿠란]을 읽고 있던 할리파를 성전에서 살해하였다.


4대 할리파 - 알리

알리는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남편이고, 예언자를 양육한 숙부 아부 탈립의 아들이었다.

그의 통치는 시초부터 심한 저항에 부딪혔다. 결국 여러 전투와 내부 분열 등으로 그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버렸고 결국 661년 1월 예배를 위해 쿠파 모스크로 들어가던 알리는 하와리즈의 광신자에게 암살당한다.


그 후 알리의 신봉자들은 그의 장남 하산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허약하고 야심 없는 하산은 무아위야로부터 설득 당해 할리파 계승권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무아위야가 할리파로 인정받게 되었는데, 할리파로 인정받은 무아위야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우마이야 조를 세움으로써 정통할리프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알리를 지지하는 이들은 그의 아우 후세인을 지지하며 시아파를 결성하였다.


무아위야조 할리파 (아랍제국)

661년부터 750년까지 무아위야 가의 14인의 할리파가 아랍제국 통치하였는데, 이 아랍제국은 아랍인을 중심으로 한 제국으로서 우마이야 가의 한 가계가 차례로 할리파 직을 계승했을 뿐 아니라 제국 통치에 있어서도 예전의 할리파와는 달랐다.

무아위야는 종교적 지도자라기보다 오히려 세속적인 정치 지도자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고대 아랍 시는 이슬람 이전 시대 볼 수 없었던 최대의 융성기를 맞았다.


[주요 사건]

680 무아위야가 죽고 아들 야지드가 계승함, 알리의 아들 후세인이 카르발라에서 살해됨.
705 할리파 왈리드가 다마스쿠스에서 대모스크를 세움.
747 압바스가 우마이야 조의 페르시아 총독을 추방.
750 아부 알 압바스가 마르완 2세를 무찔러 우마이야 조 종말을 고함.

 

4. 이슬람 제국의 성립과 전개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우아미야 조에 대해 종교적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압바스 조(750~1258)는 500년 동안이나 계속된다.

할리파 제국의 변화 이슬람 문화
750 아부 알 압바스가 할리파가 되어 하시미아를 수도로 삼음

754 아부 알 압바스 뒤를 이어 형 만수르가 할리파가 됨

762 만수르가 새 수도 바그다드 건설함

786 하룬 알 라쉬드가 할리파에 오름

809 하룬 알 라쉬드가 죽고 두 아들이 계승권을 둘러 싸고 전쟁을 일으킴

813 마문이 형 아민을 무찌르고 할리파가 됨

827 무타질라의 가르침이 22년간 국교가 됨

833 무타심이 할리파가 되어 터키 노예에 의한 친위대 조직

836 무타심이 바그다드로부터 사마라에 천도

892 사마라를 포기하고 바그다드가 다시 수도가 됨

945 페르시아 부아이흐 조가 바그다드를 점령하여 제국을 지배하에 둠

1055 셀주크 터키가 바그다드 점령하나 압바스 조 명칭은 남김

1096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로 이르고 다시 남방으로 진출

1099 십자군이 예루살렘 점령

1187 살라딘이 십자군을 무찌르고 예루살렘 점령

1221 몽고군이 페르시아를 짓밟음

1258 몽고의 훌라구가 바그다드 점령하고 압바스조를 종언케 함
756 우마이야 조 압달 라흐만이 코르도바를 수도로 하여 제 2우마이야 조 수립

788 모로코가 이드리스 조 밑에서 독립함

799 튀니지가 이글라브 조 밑에서 독립함

825 이글라브 조 시칠리아 침략을 시작함

863 이븐 툴룬이 이집트에서 투룬 조를 창시함

910 쉬아파의 파티마 조가 북아프리카를 제압하고 할리파로서 통치를 시작함

912 이슬람이 불가리아인 사이에 정착됨

922 코르도바의 제2우마이야 조가 세 번째 할리파로 호칭

969 파티마 조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카이로를 수도로 삼음

970 셀주크 터키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페르시아 대부분 점령

988 가즈나 조의 마흐무드가 페르시아와 북인도 점령

1010 니제르강 중류가 이슬람으로 개종

1030 제 2우마이야 조가 소왕국으로 분열

1071 만지케르트 싸움에서 이긴 셀주크군이 비잔틴움으로부터 소아시아 탈환

1085 기독교도가 에스파니아 탈환을 시작함

1087 무슬림이 팀부크투를 상업과 학문의 중심지로 만듦

1171 살라딘의 파티마 조를 타도하고 이슬람의 정통파로 부활

1211 터키인 이레트미시가 인도에 술탄 조를 열음
751 중국인 포로로부터 종이 제조법을 배움

765 이븐 바흐티슈가 바그다드에서 학교를 창설함

767 이슬람법의 하나피 학파의 학시라 아부 하나피가 옥사함

785 압달 라흐만이 코르도바에 대모스크를 건조함

795 이슬람 법의 말리크 학파의 창시자 말리크 이븐 아나스 죽음

814 이슬람 법 샤피 학파의 창시자 샤피가 이집트에의 중요한 논문 라샬라를 씀

830 할리파 마문이 바그다드에 지혜의 관을 설치

833 전통주의자인 이븐 한발디가 무타질라 가르침을 거부하여 투옥됨

922 수피 순교자 할라즈가 이단 혐의 받고 처형됨

970 파티마 조가 카이로에서 알 아즈하르의 모스크 대학 세움

1010 페르시아인 페르두시가 <왕서> 완성

1030 비루키가 <인도의 서>를 씀

1067 재상 니잠 알 물크가 바그다드에 니잠비아 학원 설립하고 아샤리 신학을 정통신학으로 삼음

1090 신비주의자이며 재상학자인 알 가잘리가 <종교제학의 부활>을 쓰기 시작함

1123 시인이며 천문학자인 오마르하이얌이 죽음

1171 이븐 루쉬드(아베로에스)가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중추설을 씀



III. 이슬람 신앙

1. 이슬람의 기본경전: <쿠란>과 <하디스>

① 쿠란 [Quran]
쿠란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신의 말씀을 모은 것으로 아랍어로 쓰인 장단 1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쿠란’이란 말은 본래 ‘낭송하다’,‘읽는다’라는 동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읽어야 할 것’,‘낭송되어야 할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쿠란은 높은 소리로 낭송되어야 하는 경전이다.

쿠란의 체계: 쑤라(Surah)라고 불리는 장단 114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은 루쿠(Ruku, 부분)와 아야(Ayah, 절)로 구분되어 있다.


②하디스 [Hadith]

하다스는 알라의 사도인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수록한 것으로서 [쿠란]에 다음가는 권위가 인정되었다.

2. 이슬람의 교의

(1) 이슬람 신앙의 근원
이슬람 교의는 계시서인 [쿠란], 예언자의 언행과 관습인 순나, 공동체의 일치를 의미하는 이즈마(Ijma), 개인의 창조적인 사상인 이즈티하드(Ijtihad)의 네 가지 근원적인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이 교리를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하여 체계화한 이슬람의 율법(Sharia)도 그 기반은 마찬가지다


(2) 이슬람의 기본교리: 六信五行
1) 믿음 (이만, Iman)

① 신 : 절대 유일신 알라에 대한 믿음, 다른 어떤 중간자도 존재할 수 없다는 대원칙이 강조됨.

② 천사 : 가브리엘(최상의 천사로서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전함)과 미카엘(천지에 대한 신의 명령을 실행에 옮기고 풍우를 보내는 천사로 등장)에 대한 믿음.


③ 성전 : 신이 인류에게 내린 계시는 전체 140여 개이며, 그 성전 중에 가장 신성한 것은 모세오경, 다윗의 시편, 예수의 복음서와 무함마드의 [쿠란] 4종이다. 그중에 [쿠란]은 가장 완전하다.


④ 예언자 : 이슬람교는 계시서 [쿠란]과 더불어 그 계시서를 받은 예언자 또는 사도의 존재를 믿는다.
많은 예언자 중에 최후의 최고로 위대한 예언자가 무함마드이다.

그는 최고로 위대하고 가장 완벽한 인간으로서 그의 언행은 무슬림에게 모범이 된다.

⑤ 최후의 심판 : 내세란 현세가 계속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⑥ 정명 : 인간의 행위와 운명은 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스스로 노력해야 하며,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2) 실천 (이바다트, Ibadat)
믿음 : 신앙고백(Shahada)-알라 이외의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 낭송.

예배
: 매일 5회씩, 일주일에 한 번 금요일에 신도가 모여 예배함.


희사
: 자기가 갖고 있는 일부 재산을 남에게 희사하면 나머지 재산은 정화받는다고 믿음.


단식
: 이슬람력 9월 라마단월에 단식함. 30일 동안의 낮시간 동안 금식.


순례
: 메카로의 순례, 무슬림은 모두 일생에 한 번은 예언자가 최초로 계시를 받은 메카로 거룩한 여행을 할 의무가 있다.


(3) 샤리아 (이슬람 성법)

샤리아의 근원 - [쿠란], [하디스], [이즈마], [끼야스]
이즈마: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의 의견 일치.
끼야스: 과거의 결정에 기초가 되는 원리에 입각한 유추.

무슬림 지도자들에 의해 형성된 샤리아의 개념은 교리, 신앙 실천, 이슬람 법학 등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샤리아의 내용은 신앙생활은 물론 이슬람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과 도덕, 예의, 행동의 지침과 인간 상호 간의 권리, 의무 등 모든 계율을 망라하고 있다.


※ 이슬람 법체계
신앙예식법 - 육신
사회생활법 - 사회기본법, 대인법, 재산관계법, 형법, 절차법 등


(4) 이슬람학
일반적으로 이슬람의 학문을 이슬람 신앙과 관련된 이슬람학과 과학기술을 다루는 외래학으로 구분한다.


3. 이슬람의 종파

(1) 하와리즈
하와리즈(Khawarij)파는 최초의 이슬람 종파이다.

이 파는 할리파 우스만이 살해된 이후에 알리와 무아위야간의 투쟁 중에 초기에는 알리를 지지하였으나 양자가 협상을 통해 해결하려 하자 성스러운 움마의 주도권을 협상한다는 그 자체가 신에 대한 모독이라며 알리 진영을 박차고 나간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이들은 현실에서 과격성을 띄고 있었으며 그 결과 지하드를 중시하였다. 이 파는 지나치게 과격해서 현실에 정착하지 못하고 결국 9,10세기에는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2) 시아파

시아파는 이슬람의 주류인 순니와 더불어 현재 잔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분파이다.
하와리즈가 알리 진영을 떠난 것과는 달리 그 진영에 끝까지 남아 알리를 지지한 파이다.

(3) 순니파

우리가 이슬람이라고 말할 경우 그것은 통상 정통 주류파의 순니를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순니란 종파로서의 의미보다도 타 종파 특히 시아파와 구별할 때만 사용된다고 해도 좋다. 실제로 무슬림의 90% 정도가 순니이기 때문에 그들을 따로 부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시아파는 이란을 배경으로 하여 아랍적인 순니파가 인정할 수 없는 해석을 견지하기 때문에 양자는 구분되어야 한다.


4. 이슬람의 신비주의

(1) 신비주의의 발전
12세기 이후 이슬람을 지배한 사상은 신비주의였다. 이를 수피즘이라 부르기도 한다.

864년이래 신비주의 운동의 중심은 바그다드로 옮겨지게 됨. 10세기에서 11세기에 걸친 이 시대는 이슬람 사상계의 황금시대였다.

이 황금시대를 지탱한 세 기둥은 신학, 철학, 신비주의였다.

이때 이 셋을 편력한 후 중세 이슬람 사상계를 통일한 인물이 바로 알 가잘리이다.


5. 이슬람의 성소와 축제

성소: 메카의 카바,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의 모스크, 예루살렘, 수피 성인의 사당

축제: 무하람, 예언자의 탄생일, 겨울의 밤, 9월 단식의 달 등. 모두 이슬람력을 기준으로 한다.


출처: 청년사의 '세계 종교사 입문'의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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